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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Play

클라이밍에 정답은 없어

 

기계체조 선수 출신 아빠와 한국무용을 전공한 엄마 사이에서 돌연변이에 가까운 몸치였던 나. 운동 신경이 없어도 어찌나 없는지 모든 종목의 운동에 젬병이었다. 가장 싫어하는 과목은 당연히 늘 체육이었다. 나도 체육을 포기하고 체육 선생님도 나를 포기했다. ‘가가가’로 빼곡한 체육 성적표를 보며 ‘몸으로 하는 모든 건 내 것이 아니다’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내가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몸으로 하는 취미를 갖게 됐다니, 그것도 클라이밍에 빠지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 클라이밍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중 대중적으로 ‘클라이밍’이라 통용되는 볼더링을 클라이밍으로 칭한다.

 

암장에 간 첫날, 맨손으로 벽을 타고 정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날다람쥐처럼 벽을 탄다는 건 몸치인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겁도 났다. 하지만 오직 손만으로 이 몸뚱이를 들어올려 중력에 저항한다는 원초적 속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꾸준히 지구력을 키우면서 낮은 난이도의 문제부터 풀어가다 보니 차츰 자신감도 생겼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완근을 자랑했고 클라이밍 다녀온 다음 날 온몸이 아프지 않으면 시무룩했다(제 전완근 자랑에 이용당한(?) 모든 분께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여행에 가서까지 완등하지 못한 문제 영상을 보며 ‘루트 파인딩’ 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클라이밍이 내 취미가 됐음을 확신했다.

 

(좌) 송지선 CⓔM이 클라이밍을 하는 모습 (우 위부터) 지인들과 함께 즐기는 현장, 새로 산 클라이밍 신발

 

나를 스쳐간 수많은 운동 중 클라이밍을 취미로 모시게 된 강력한 매력 포인트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란 점이다. 암장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정기권을 끊으면 주에 몇 번을 방문하든, 몇 시간을 머물든 상관없다. 시간제 또는 횟수제로 차감되는 여타 종목의 운동시설과 다르다. 입문할 때는 암벽화, 초크 외에 필요한 장비가 크게 없어 비용도 들지 않는다(나중에 프린팅이 예쁜 티셔츠를 잔뜩 사게 되는 건 논외로 하자).

하지만 클라이밍을 사랑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정상에 오르는 방식에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효율적인 방식은 존재하지만 어느 정도의 기술을 구사할 줄만 알게 되면 각자의 체형과 성격에 따라 등반 스타일이 달라진다. 팔이 짧은 사람은 높은 홀드를 잡기 위해 하체에 집중하고, 겁이 많은 사람은 뾰족한 장애물을 피할 방법을 고민하며 벽을 탄다. 다리가 긴 장점도 홀드 간 사이가 좁은 구간에서는 단점이 될 수 있고, 느긋한 성격은 공중에서 힘을 들이지 않을 방법을 고민하게 만든다. 뭐가 됐든 완등에 성공하면? 그걸로 끝이다. 이처럼 내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다른 지점에서 보완해가며 몸의 균형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송지선 CⓔM이 좋아하는 볼더링 종목 천종원 선수가 설명하는 클라이밍의 기초.

 

이런 점에서 클라이밍은 나 같은 몸치들이 타인과 즐기기 좋은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돌아보면 헬스장에서, 수영장에서, 필라테스 수업에서 나는 즐기거나 집중하지 못했고 이따금 외로웠다. 누군가와 함께해도 (대개 내가 더 못했기 때문에) 페이스가 맞지 않거나 숨을 고르느라 웃을 정신이 없었다. ‘난 왜 이렇게 못하지’ 주눅들었고 스스로를 갉아댔다. 하지만 암장에서는 타인과 나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난 팔이 짧은 대신 순발력이 좋은데, 넌 다리가 긴 대신 허리가 뻣뻣하구나. 인정하면 끝난다. 서로 등반법을 봐주면서 웃고, 격려하고, 연구하고, 배우고, 공유하는 과정 속에서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동시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지극히 사적인 이 글이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길 바란다. 특히 운동은 남 얘기 같거나 재미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클라이밍을 검색해 집 근처 암장을 찾아보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혼자만 알기 아까운, 재미있는 클라이밍을 친구, 연인 혹은 가족과 함께 즐기고 그 과정 속에서 ‘나’를 발견하길 그리고 더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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