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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The Issue

실제와 가상의 공존

허물어지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

 

글 조진혁 / <ARENA Homme+> 매거진 에디터.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한다.

 


 

이건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야. AR 앱으로 조카에게 공룡을 보여주며 말했다. 휴대폰 속 화면에선 티라노 사우르스가 거실 매트 위에 서 있다. 조카도 안다. 이건 AR 앱이고 어디서 다운받으면 되는지. 조카는 신기해하며 나에게 티라노가 얼마나 강한 공룡인지 설명했지만 이내 다른 앱을 설치하며 AR 공룡에게서 관심을 잃었다. 나도 공룡에게는 더 이상 관심이 없긴 마찬가지라, 포유류만 나오는 ‘동물의 숲’을 켰다. 조카는 밥 먹으라는 소리에도 들은 척하지 않고 닌텐도 스위치에만 열중했다. 조카가 잘못된 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거다. 그리고 증강현실 시현의 신기함을 넘어 사용자를 가상의 세계로 끌어들인 ‘동물의 숲’ 탓도 조금 있고. 조카와 내가 선택한 것은 진짜 같은 현실이 아니고 가짜 같은 현실도 아닌 현실 같은 세계다.

 

닌텐도 스위치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 자신의 캐릭터를 설정해 동물 주민들과 마을을 가꾸는 게임으로 코로나19 상황 속 자유와 힐링을 느낄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출처 한국닌텐도 공식 유튜브 영상 캡처 / 클릭 시 영상 재생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그리고 혼합현실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가상화 분야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VR(Virtual Reality)이라 불리는 가상현실은 전용 디바이스를 착용해 실제 환경을 차단하고, 디바이스에 표시되는 가상 환경을 체험하는 것이다. VR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AR(Augmented Reality)은 증강현실로 현실 환경 위에 그래픽을 투영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포켓몬 GO’ 게임과 ‘틱톡’이 있다.

 

미국의 스타트업 매직리프는 상호작용형 3D 홀로그램 구현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출처 유튜브 영상 캡처 / 클릭 시 영상 재생
VR은 현실과 무관한 100% 가상의 세계, AR은 실제를 기반으로 그 위에 가상의 정보를 얹은 것, MR은 이 둘을 동시에 구현한 것이다. 출처 유튜브 영상 캡처 / 클릭 시 영상 재생

 

주목할 것은 혼합현실인 MR(Mixed Reality)이다. 현실 환경에 가상의 정보를 더 하는 방식으로 VR과 AR의 장점을 결합했다. 매직리프사는 농구장 코트에서 고래가 솟아나는 모습을 3D 영상으로 표현해 고도의 현실감을 선사한 바 있다. 이렇듯 VR과 AR은 점차 융합되는 추세이며, 혼합현실은 MR 시스템 기술과 MR 모션 플랫폼 기술 등이 더해지며 더욱 사실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먼저 움직인 공연계

언택트 시대가 되자 공연 문화가 달라졌다. 매년 케이팝 팬들을 불러모았던 케이콘은 올해 오프라인 공연을 취소하고 VR과 AR을 활용한 팬미팅과 공연을 선보였다. <케이콘택트 2020 서머>에서는 아이돌들이 매일 밤 10시부터 4시간씩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공연을 선보였는데, 이때 활용한 기술이 혼합현실이다. 이들은 기존 공연장 세트가 아닌 흑색 사막이나 환상적인 우주에서 무대를 펼쳤다. 총 8개의 가상공간이 등장했으며 무대에서 AR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팬들은 단순히 채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 공중에 그림을 그리는 AR 드로잉으로 응원을 보냈다.

 

일주일 동안 유튜브를 기반으로 개최된 <KCON:TACT 2020 SUMMER>. 라이브 콘서트, 아티스트의 온라인 콜라보, 팬들과의 인터랙티브 기능이 적용된 프로그램 등 600여 개 컨텐츠가 진행됐다. 출처 유튜브 영상 캡처 / 클릭 시 영상 재생

 

SM엔터테인먼트의 온라인 콘서트에도 혼합현실이 등장했다. 노래하는 동방신기 머리 위에 거대한 고래가 등장하는 등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공간과 증강현실 컨텐츠가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렇듯 혼합현실은 2020년대 케이팝 공연에서 중요한 연출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사건 사고 없는 스타

릴 미켈라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2.6백만에 달한다. 2018년에는 <타임>이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에 BTS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패션계가 러브콜을 보내는 그녀는 19세의 패션 인플루언서다. 최근에는 할리우드 3대 에이전시인 CAA와 계약을 체결할 정도로 그 인기와 영향력은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는다. 더 놀라운 점은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19세라는 것이다. 릴 미켈라는 나이를 먹을 이유가 없다. 그녀는 10년 뒤에도 19세로 활동하며 명품 패션브랜드의 캠페인 화보촬영을 소화할 것이다.

 

CGI 아바타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Lil Miquela). 출처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캡처 / 클릭 시 이동
릴 미켈라의 Speak up 뮤직비디오. 출처 유튜브 영상 캡처 / 클릭 시 영상 재생

 

그녀가 세월을 요리조리 피하는 이유는 가상 인물이기 때문이다. 릴 미켈라는 정교한 그래픽으로 제작되어 실제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그녀의 팔로워들은 그녀가 가상 인물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소셜미디어에서 그녀는 실제 사람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모와 태도, 성격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있다. 많은 셀럽들이 사건 사고로 구설수에 오르며 고충을 겪는데 반해 가상 인물인 릴 미켈라는 사생활이 없고, 도덕적 문제를 거론할 수도 없다. 기업은 전속 모델로 삼은 연예인이 언제 사건·사고를 일으킬지 몰라 전전긍긍하지만 가상 인물은 그런 리스크로부터 자유롭다.

모델 활동은 릴 미켈라의 시작일 뿐이다. 이제는 아티스트의 영역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상 인물인 릴 미켈라가 발표한 앨범은 스포티파이에서 매달 8만 명 이상이 스트리밍한다. 뮤직비디오도 화제를 일으켰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할 조카는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게 될까. 어쩌면 가상 인물의 굿즈를 구입하러 다닐지도 모르겠다.

 

실감 나는 박물관

올해 국내 박물관의 주요 키워드를 꼽자면 ‘실감’이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박물관 상설 전시 공간에 실감 컨텐츠 체험 공간을 조성했다. 박물관이 소장한 문화재를 실감 컨텐츠로 제작하고 관객은 이를 직접 체험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네 개의 전시공간에 실감 컨텐츠가 마련됐다. 1층 복도에는 경천사 십층석탑이 디지털 영상으로 표현됐다. AR 기술이 적용된 영상으로 관람객은 각 면의 조각을 자세히 살펴보거나, 일몰 후에는 석탑에 새겨진 조각의 의미, 숨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감상하게 된다. 기존에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내용을 관람객이 AR 기술을 통해 쉽고 정확하게 체험하게 된다.

 

 

그 외에도 미디어파사드로 구현된 작품, VR을 통해 체험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박물관에 갈 수 없는 관람객을 위해 온라인으로 문화재를 감상하는 방법도 등장했다. K-뮤지엄 프로젝트는 온라인 VR로 박물관을 감상하는 서비스다. 360도 회전 가능한 VR 영상이 실제 박물관에 간 듯한 감각을 제공한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

진짜도 아닌 것과 가짜도 아닌 게 있어. 뭐가 더 좋아? 조카는 진짜가 좋다고 말했다. 초등학생에게 AR은 시시하고, VR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은 조카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나와 있던 기술이니 이미 예전 기술이라 느끼는 것 같았다. 격세지감이다. 혼합현실이 미래 먹거리가 될 것은 분명하다. 글로벌 IT 기업과 통신사들이 주력 개발하는 것도 전부 MR 분야다. MR과 현실 서비스와의 연계가 관건이다. 음악 무대에 고래가 등장하고 화성에 무대를 설치하는 것처럼 MR은 스포츠 중계와 전시, 의료, 게임 분야 등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펼쳐나갈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래서 그게 진짜냐는 것이다. 우리가 몰입하게 되는 것은 진짜다. 화려한 볼거리는 눈요기다. 이목을 끈 다음에는 어떻게 이 사람들을 붙잡아 둘 것이냐가 중요하다. 가상현실은 가상 세계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머물고자 하는 곳은 이야기가 전개되고, 소통이 이루어지며, 내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세계다. ‘동물의 숲’에는 VR이나 AR, MR은 없다. 하지만 가상의 세계이고, 가상의 통화가 이루어지며, 가상의 노동과 아바타가 내게 성취감을 전한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금,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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